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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강제매각과 언론인 테러김종철의 언론과 권력 (22)
김종철 (언론인)  |  cckim99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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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3.20  11:4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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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윤리위법 파동’에서 실질적으로 승자가 된 박정희 정권은 1964년 12월 3일 한일회담을 재개했다. 거기에는 미국의 보이지 않는 압력이 작용했다. 그해 8월 미국은 이른바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강화하고 있었다. 존슨 행정부는 8월 2일부터 4일까지 베트남 동북부의 통킹만 해상에서 북베트남 해군 어뢰정 3척이 미 해군 구축함 매독스를 두 차례 공격했다고 발표했다. 나중에 뉴욕타임스가 단독으로 보도한 미국 ‘국방 보고서’의 내용에 따르면 두 번째 공격은 미국의 자작극일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미국은 북베트남의 일방적 공격이라고 몰아붙이면서 전쟁을 확대했다.

미국은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그 전쟁에 ‘연합국’을 끌어들이려고 애썼다. 가장 압력을 많이 받은 나라는 한국이었다. 미국은 한일회담 타개를 통해 한국·일본 두 나라와 미국의 ‘삼각체제’를 굳혀 극동의 ‘반공 보루’로 삼는 한편 한국 정부의 베트남 파병을 유도하려고 했다

1964년 1월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은 평화선(1952년 1월 18일 대통령 이승만이 한국 연안수역 보호를 위해 선포한 해양주권선)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한일회담을 빨리 타결하라고 박 정희 정권에 촉구했다. 1965년 1월 12일 일본 총리 사토가 미국을 방문해서 대통령 존슨과 회담을 가진 뒤 한일회담은 급속히 진전되었다. 2월 15일 두 나라는 ‘한일기본조약’에 합의했다. 한국의 야당과 대학생들이 강력하게 반대운동을 펼쳤으나 기본조약은 2월 20일에 가조인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기본조약에서 평화선을 실질적으로 포기했다.

정식 조인을 저지하기 위해 야당과 학생들이 필사적으로 투쟁을 벌였지만 한일협정은 결국 1965년 6월 22일 일본 도쿄에서 조인되었다. 공화당은 야당과 학생운동권의 비준 반대 투쟁을 무릅쓰고 1965년 8월 14일 국회에서 비준동의안을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그 하루 전에는 뜨거운 쟁점이 되어 있던 베트남 전쟁 전투병 파견 동의안 역시 공화당 단독으로 의결했다. 한일협정은 12월 18일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그렇게 어지럽던 1965년에 박정희 정권이 언론계를 상대로 저지른 가장 큰 사건은 ‘경향신문사 강제 매각처분’이었다. ‘국정원 과거사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2005년 7월 22일에 발표한 조사결과를 보면,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박정희의 지시를 받고 그 일을 주도했다고 한다.

이준구가 사장으로 있던 경향신문은 1964년 5월 ‘허기진 군상’ 등의 시리즈를 통해 도시 영세민들의 비참한 삶과 정격유착의 실태 등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 시리즈는 가난한 농민들과 서민들이 보릿고개를 넘어가는 절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함으로써 ‘조국 근대화’와 ‘고도성장’을 외치던 박 정권을 크게 자극했다. 그해 6월 계엄령 선포로 그 시리즈는 중단되었으나 박정희는 경향신문의 여러 기사에 대해 격분했다고 한다.

“경향 강탈의 시나리오는 용의주도했다. 1965년 9월 경향신문의 채권단인 한일은행 등 3개 시중은행은 은밀하게 경향신문 사옥과 윤전기 등에 대한 경매 신청을 했다. 당시 경향신문의 부채는 4627만 원으로 다른 신문사의 최소 1억 원대 빚에 비해 양호한 편이었다. 그런데도 채권단은 경매 신청에 앞서 유독 경향신문에 대해서만 채무 잔액을 일시에 상환하라고 통고했다. 여기에도 물론 중앙정보부 간부들이 배후에서 조직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드러났다.”(이재국, ‘독재정권이 경향신문 빼앗았다’, 경향신문, 2005년 8월 16일자)

결국 경향신문사는 1966년 1월 25일 단독 응찰자였던 기아산업 사장 김철호에게 넘어갔다. 감정 최저가인 2억1천만 원이라는 헐값으로 신문사를 가져간 것이었다. 경매를 통해 언론사 경영권이 바뀐 것은 한국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한일회담 타결과 한일협정 비준을 둘러싸고 정국이 격동하던 시기에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그리고 극소수 신문을 제외한 대다수 언론매체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기사와 논평을 내보냈다. ‘유성 회담’ 이후 언론계 대표들이 박정희에게 백기를 들고 굴종하기 시작한 것이 큰 원인이었겠지만, 정권의 테러 공세가 언론인들을 잔뜩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1965년 6월 15일 계엄사령부는 한일회담 반대투쟁 과정에서 학생들의 집회와 시위, 단식농성을 상세히 보도한 동아방송 라디오의 ‘앵무새’ 프로그램 관계자 6명을 반공법과 집시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8월 25일에는 대학가에서 데모를 취재하던 기자 10여명이 경찰관이나 군인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9월 7일 밤에는 ‘괴한들’이 동아일보 편집국장 대리 변영권의 집 대문을 폭파했다. 이튿날에는 동아방송 제작과장 조동화가 서울시경에서 나왔다고 자칭하는 괴한에게 납치되어 폭행을 당한 뒤 외딴 곳에 버려졌다.

박정희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언론인들에 대한 테러는 1966년에도 계속되었다. 4월 25일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최영철이 괴한의 습격을 받아 폭행을 당했고, 7월 20일 밤에는 같은 신문 정치부 차장 권오기가 밤중에 집 앞에서 괴한들에게 뭇매를 맞았다.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총선거의 해인 1967년에 접어들자 언론인들에 대한 박 정권의 탄압은 훨씬 더 심해졌다. 한일 수교와 청구권 문제, 그리고 베트남 파병을 마무리한 박 정권은 장기집권을 위한 공작을 은밀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5월 3일에 실시된 제6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는 야당의 분열 덕분에 116만여 표 차이로 윤보선을 눌렀다. 부정선거라는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으나 박정희는 재선에 성공했던 것이다. 1967년 6월 8일에 치러진 총선거는 금권과 관권, 폭력이 판을 친 부정선거였다. 박 정권의 지시에 따라 군수와 경찰서장은 물론이고 선거관리위원장까지 부정선거에 앞장을 섰다. 일부 지역에서는 유권자들이 여당을 찍은 투표용지를 공화당 운동원이나 공무원들에게 보이고 나서 투표함에 넣는 ‘공개투표’가 자행되었다. 야당 참관인 없이 개표가 이루어진 곳도 많았다. 이렇게 총체적인 부정선거 결과로 공화당은 130석을 얻어 전체 의석의 74%를 차지했다. 개헌선 117석을 크게 웃도는 수치였다.

야당인 신민당과 학생운동권이 집회와 시위를 통해 ‘6·8 부정선거 규탄운동’을 치열하게 벌였으나 박 정권은 무자비하게 그 운동을 억눌렀다. 종신집권을 최종 목표로 삼고 있던 박정희 앞에 남은 마지막 장벽은 헌법의 ‘3선 금지’ 조항이었다. 제3공화국 헌법 제69조 3항은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라고 명시하고 있었다. 그것을 깨뜨리고 종신집권으로 갈 수 있는 길은 개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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