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시사 정치·정당 사회디자인연구소
묻는다. 우리는 망국 조선과 다른 길을 가고 있는가?김병준의 특별기고)망국의 역사와 오늘의 국가운영체계: 혁명의 꿈

시대의 어둠을 찢는 천둥 벽력같은 명문입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그리고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타파할 힘과 지혜를 어떻게 모을지 얘기해 봅시다.

이 글은 2015년 10월 출판된 <세상을 바꾸라 Ⅲ>(도서출판 오래)에 수록된 ‘망국의 역사와 오늘의 국가운영체계’의 일부 문장을 수정한 글입니다.

1. 망국의 역사를 생각하며

우리는 망국(亡國)의 역사를 가진 민족이다. 싸움 한 번 못해보고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겼다. 그러고도 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지도 못했다. 연합군의 승리에 의해 되찾은 나라,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로 쪼개진 상태다.

어쨌든 광복 70년, 비록 쪼개진 한쪽의 역사지만 자랑스럽다. 국민소득 60불로 세계에서 가장 못 살던 나라가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고도 이제 3만 불을 바라보는 경제 대국이 되었다. 또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민주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왜 이리 불안한가? 70년의 성공의 역사, 왜 그 뒤로 망국의 역사가 다시 느껴질까?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 이것이 망국 조선을 위태롭게 했던 당시의 주변 환경 같고, ‘모이자’ ‘이기자’만 외치는 여의도 정가의 모습에서 조선을 망국으로 이끌었던 세도정치의 모습을 본다. 꿈을 잃은 정치, 길을 잃은 국회, 움직이지 않는 관료체제....... 이 나라에서 망국 조선의 망령을 보는 것이 영 잘못된 일일까?

성공에 취할 때가 아니다. 오히려 망국의 역사를 가슴에 담아야 할 때다. 차라리 져서 정복이라도 당하지. 싸움 한 번 못하고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더냐. 변화하는 세상에 길을 잃은 국가, 다시 망하고 싶지 않으면 그 망국의 역사를 가슴에 담아야 한다.

그리고 물어야 한다. 권력을 쫓는 패거리나 만들어 ‘이기자’나 외치는 나는 그때의 누구인지? 세상 변하는 줄 모른 채 자신이 아는 것이 세상 모두인 양하는 나는 그때의 누구인지? 또 이 모든 것을 보고도 움직이지 않는 나는 그때의 누구인지를 물어야 한다. 그러자고 쓴다. 이 부족한 글을.

2. 나라가 아니었던 나라

신미양요, 그 참담한 기록
신미양요(1871) 전투에 참전했던 맥클레인 틸턴(McClane Tilton) 미 해병대 대위의 글을 읽었다. 그가 그의 아내에게 쓴 장문의 편지들이다. 전쟁 중에, 그것도 전투를 지휘하는 일선 지휘관이 수시로 이렇게 긴 편지를 쓸 시간이 있었다니? 조선군을 보는 그들의 시각이 바로 느껴졌다.

하나 둘 읽어가면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리고 곧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을 만큼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전투는 3일, 그러나 의미 있는 전투는 마지막 날의 광성보전투였다. 약 한 시간 남짓 걸렸던 전투, 그가 묘사한 이 전투의 모습을 보자.

"조선군은 맹렬히 저항했다. 호랑이 잡는 포수까지 징발하여 편성한 병력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가진 무기라고는 겨냥도 제대로 안 되는 대포에, 재장전에 시간이 걸리는 화승총이 고작이었다. 최신식 대포와 최신식 레밍턴(remington) 소총으로 무장한 미군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미군이 성벽 가까이 진격을 하자 재장전할 시간이 없는 조선군은 성벽 난간에 올라가 몸을 그대로 드러낸 채 돌을 던지고 흙을 뿌렸다. 후방에 있는 미군은 이들의 드러난 몸을 놓치지 않았다. 총알을 막아보겠다고 솜옷을 8겹 9겹 입었건만 무슨 소용이 있었겠나. 미군은 저격하듯 이들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순식간에 조선군 2백5십 명 가까이 전사했다. 상당수가 바다로 뛰어들어 자결했다. 산 자는 포로로 잡힌 스무 명 정도였다. 미군 전사자는 장교 1명을 포함해 단 세 명이었다.

성벽 위에 널브러진 주검들, 틸턴 대위는 이를 이렇게 묘사했다. “대부분이 머리에 총을 맞았다. 입은 옷이 흰옷이라 피를 흘리며 죽어간 모습이 더욱 끔찍했다. 모두들 돼지처럼 피를 흘린 채(bled like pigs) 죽어 있었다.”

뭐라? 돼지처럼? 무슨 뜻에서 한 말인지 모르지만, 그저 참담할 뿐, 시비해서 무엇하겠나. 이게 나라인가? 정말 이게 나라인가? 병사와 총이 모자라 호랑이 잡는 포수까지 잡아다 싸우게 하고, 최신의 포와 소총으로 무장한 적을 향해 돌을 던지다 죽게 하는 나라, 싸우지 않고 물러나면 가족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고, 포로로 잡힌 병사들을 겁쟁이들이니 죽이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 큰소리치는 나라, 이게 나라인가?

기록도 엉망이었다. 고종 실록에는 전사자가 50여 명뿐이라 되어 있고, 장렬히 전사한 어재연장군의 공을 논함에 있어서는 선두에서 군사들을 지휘하여 적을 ‘무수히’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다운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뿐 아니다.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 물러나는 미 함대를 보고 이 전투를 승리라 자축했다. 다시 묻는다. 이게 나라였던가?

일찍이 예견되었던 일
예견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일찍이 정약용선생(1762-1836)이 군기론(軍器論)에서 말했다. 각 고을에 보관된 군기의 상황을 보고 나서다.

“활을 들면 좀먹은 부스러기가 술술 쏟아지고, 화살을 들면 깃 촉이 우수수 떨어진다. 칼을 뽑으니 칼날은 칼집에 그대로 있고 칼자루만 뽑혀 나온다. 총은 녹이 슬어 총구가 꽉 막혔다. 온 나라가 맨손뿐인 형국이니 이는 외적 앞에 군대를 맨몸으로 내보내는 것과 같다.”

선생이 이렇게 피를 토하듯 문제를 지적하고도 수십 년, 조선의 군(軍)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변할 수가 없었다. 군비강화를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하는데, 이 돈부터 확보할 수가 없었다. 양반들의 기득권이 그대로 유지되는 상황 속에서, 또 부정부패가 만연한 상황 속에서 세금인들 제대로 거둘 수 있었겠나. 면세지, 즉 세금을 내지 않는 땅은 오히려 더 늘어나고 있었다.

원래 군사력이 강한 조선이었다. 건국 초기에는 강한 전투력을 가진 직업군인이 있었다. 또 군사과학의 수준도 높았다. 세종대왕 시대에 만들어진 다연발 발사체 신기전(神機箭)은 조선이 어느 정도의 군사력을 가졌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러나 재정이 약화 되면서 이 모든 것이 달라졌다. 후기로 갈수록 더욱 그러했다. 우선 돈이 없으니 직업군인 체제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도리 없이 병농일치(兵農一致), 즉 농민에게 군역의무를 씌웠다. 하지만, 농민은 모아봐야 오합지졸, 게다가 훈련도 제대로 시키지 않았다. 어쩌겠나. 전쟁이 나면 물러서거나 도망가면 죽이겠다고 겁이나 주는 게 상책이었다.

무기를 개발하거나 잘 관리하는 것도 그랬다.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앞으로 가는 게 아니라 뒤로 가는 나라, 그래서 결국 나라도 아닌 나라가 되어 버린 조선이었다.

3. 어쩌다 그렇게 되었나?

오래전부터의 경고
국가의 기본인 군(軍)이 그 정도였으니 다른 부분이야 말해 무엇하겠나. 말기의 조선은 그야말로 딱하기 그지없는 나라였다. 1897년 발행된 비숍(Isabella Bishop)여사의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의 한 대목을 보자.

상위 계층은 이해하기 힘든 전통과 관념에 묶여 빈둥거리고, 중간 계층은 일하고 싶어도 일 할 자리가 없다. 하위 계층은 ‘늑대’가 문으로 기어들어오는가만 지켜볼 뿐, 더 이상의 일은 하지 않는다. 먹고 살기도 힘든 판에 계급적 특권과 착취가 판을 치고, 정의는 찾아볼 수가 없다. 백성의 삶과 떨어진 허약한 임금, 온갖 음모를 획책하는 ‘허가받은 도둑들,’ 서로들 챙겨 가겠다고 다투는 외국 세력들........ 조선은 모든 것이 천하고 딱하고 초라하다(446쪽).

다시 읽어보자. 계급적 특권과 착취, 정의는 찾아볼 수 없고, 민생이 어떤지도 모르는 허약한 임금, ‘허가받은 도둑’의 부정부패, 음모를 획책하는 외국 세력....... 그래서 모든 것이 천하고 딱하고 초라한 나라.

언제부터일까? 언제부터 이렇게 망조가 들었을까? 선조 7년인 1574년 이율곡 선생이 당시 임금인 선조에게 올린 긴 상소문, 만언봉사(萬言封事)를 보자. “(나라 형편이 말이 아닙니다.) 큰 집에 비유하면 크게는 들보에서 작게는 서까래까지 썩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서로 떠받치고 지탱하며 근근이 하루하루를 보내고는 있지만, 동쪽을 수리하려 하면 서쪽이 기울고, 남쪽을 보수하려 하면 북쪽이 무너질 판입니다.”

1574년, 신미양요가 일어나기 3백 년 전이었다. 그때 이미 나라는 나라 꼴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죽하면 선생이 이렇게 말했겠나. “(사람으로 치면) 원기가 다 빠져 보양을 한다고 해도 몸을 지탱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선생이 말했다. 대대적이고 근본적인 개혁을 해야 한다고.
“대개 법이란 때에 따라 제정하는 것이니, 때가 바뀌면 법도 바뀌어야 합니다........ 나라를 세울 당시 빈틈없이 만들었겠습니다만 세월이 흘렀으니 세상도 바뀌고 일도 바뀌었을 겁니다. 후대에 잘못 만든 법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듯 서둘러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경고했다. “세상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고 백성들의 기력 또한 빠지고 있으니........ 지금 그러한 개혁을 하지 않으면 10년 못 가 큰 재앙과 환난을 맞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그 연도를 보자. 1574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8년 전의 경고였다.

그래서 고쳤는가? 선생이 이야기한 개혁들, 지금의 언어로 말한다면 좋은 인재가 조정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인사개혁, 민생을 위한 정책을 개발하고 이를 책임감 있게 구현하게 하는 정치ㆍ행정개혁, 군(軍)의 전투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군정개혁 등을 과감하게 단행하였는가?

아니다. 선생의 말씀은 제대로 된 의제도 되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다. 예컨대 병력을 확보하고, 확보된 병력을 정예화하는 군정개혁은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그 결과 아무런 준비 없이 임진왜란을 맞았다. 다른 과제들도 마찬가지, 기득권 구조와 의미 없는 당쟁에 가로막혀 그냥 그대로 지나가고 말았다.

오히려 더 반동적인 조선
임진왜란 이후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신분질서가 흔들리고, 상공업과 유통경제가 발달하는 등 세상이 더욱 빠른 속도로 변해 갔다. 더 큰 틀의 개혁과 혁신이 필요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조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우암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세력 등 권력을 쥔 자들은 오히려 더 반동적이 되었다. 개혁조치를 강구하는 게 아니라 주자(朱子)를 앞세워 그 역사적 흐름을 막으려 했다. 일부는 이러한 사회경제적 환경을 오히려 자신들의 권력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쓰기도 했다. 즉 고전적 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명분으로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이나 당파를 정치적으로 억압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세상은 더욱 어지러워지고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하지만, 세월은 그저 그렇게 흘러갔다. 못 이길 정도가 되면 그저 고치는 흉내나 내며 그냥 그렇게 흘러갔다. 이익선생(1681-1763)의 말이다(성호사설, 인사문편).

백성들은 어린아이가 우물로 기어들어 가는 것보다 더 위태로운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방법이 없다고 하며 못 본 체한다. 또 한다고 해 봐야 지엽적인 일일 뿐, 근본은 건드리지 않는다. 펄펄 끓는 용광로에 쇳덩이를 집어넣어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야 될 판에, 불에다 쇠를 달구어 결만 두드리는 대장장이 일이나 하고 있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용광로에 녹여 완전히 새로이 만들어야 할 판에 쇠의 결만 두드리는 대장장이 일이나 하고 있다.”

그러다 잠시 용광로에 쇠를 들이부을 수 있는 권력적 기반이 마련되었었다. 정조 때이다. 개혁군주의 리더십 아래 정치에서 소외되어 있던 남인 출신의 개혁주의자들이 조정으로 들어갔다. 채제공과 정약용 같은 인물들이었다.

나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개혁들이었다. 이를 반대하는 세력이 워낙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또 근본적인 구조변화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노력은 그 의미가 컸다.

허가받은 상인이 아니면 시전(市廛), 즉 국가가 관리하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지 못하게 하던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폐지한 것은 그 좋은 예이다. 보다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유통질서를 확립하고 시장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얼과 노비에 대한 차별을 완화시킨 일, 개혁도시와 계획도시로서의 화성을 축성한 일, 활자를 새롭게 만든 일, 서책을 간행하고 각종의 기술이 개발될 수 있는 정책적 환경을 만든 일 등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노력이었다.

규장각을 만들고 수시로 그곳의 젊은 학자들과 토론을 한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지금도 쉽게 형식화되어 버리는 각종의 자문위원회 제도나 보좌관 제도 등을 제대로 운영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임금이 행차할 때 징이나 꽹과리를 쳐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게 한 격쟁(擊錚)이나, 임금에게 직접 문서로 청을 올리는 상언(上言)을 할 수 있게 한 것도 그렇다. 새로운 행정과정을 연다는 점에서, 또 새로운 소통구조를 통해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개혁의 에너지를 모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정조 사후 끝장이 났다. 씨족 중심의 세도정치 아래 안동김씨 패거리, 풍양조씨 패거리 등,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또 그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아무런 판단도 없는 자들이 권력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권력 그 자체를 위해 권력을 쫓는 무리였다.

한심한 일이었다. 이들은 중국 중심의 질서가 와해되고 있다는 사실도, 곧이어 열강의 개방 압력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도, 또 군사력을 정비하고 기술혁신과 새로운 유통질서의 확립 중요하다는 사실도 몰랐다. 아니, 그러한 변화를 읽을 마음조차 없었다. 오로지 권력, 즉 나라가 망하든 말든 그것만 잡으면 그만이었다.

정조 사후 유배생활에 처해져 있던 정약용 선생은 이를 보고 다시 한 번 절규한다. “(사람으로 치면) 터럭 하나도 병들지 않는 것이 없다. 지금이라도 고치지 않으면 필망국(必亡國), 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이다(경세유표 방례초본).”

선생의 말씀처럼 나라는 이미 망국의 길을 걷고 있었다. 식민지의 역사와 분단의 역사도 그때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어디 나라 팔아먹은 이완용 패거리만 매국노더냐. 권력을 위해 권력을 쫓던 이들 세도정치 패거리들이 더한 매국노였다. 그리고 이들이 만든 잘못된 권력구조와 이를 고치지 못한 당시의 지도자들이 모두 공범이었다.

열강이 이 나라 한가운데로 들어오고서야 그 권력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틈새로 새로운 개혁세력이 등장했다. 김옥균을 비롯한 갑신정변 세력이 그렇고, 만민공동회나 독립협회 세력이 그렇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야말로 기력이 다 한 뒤였다. 뭉쳐봐야 그게 그것, 서로 챙겨 먹겠다고 으르렁거리는 열강의 힘을 넘어설 수가 없었다.

결국은 식민지로
어찌 보면 길게 버틴 셈이다. 16세기 후반, 이율곡 선생의 만언봉사 때 이미 나라도 아니었던 나라, 그 나라가 그렇게 오래 버텼다. 어떻게 버텼을까?

설명은 여러 가지다. 강한 중앙집권체제 아래 지방에서 일어나는 각종의 난을 평정하는 등, 그런대로 강한 압제력을 행사할 수 있어 그랬다는 설이 있다. 또 왕권과 가부장권을 중시하는 강한 유교 중심의 사고와 서원과 향교 등의 유교관련 조직들이 질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정치경제적 설명도 있다. 즉 상공업이 서구 수준으로 발달하지 못해 체제를 전복시킬 정도의 부르주아, 즉 시민세력이 성장하지 못했다는 설명이 있다. 그런가 하면 시민세력이 성장하기는 했지만, 기존의 양반체제에 모두 흡수되어 버렸다는 설명도 있다. 돈을 주고 샀건 어쨌건 어찌어찌 양반이 되었고, 양반이 되자 오히려 그 신분을 과시할 수 있는 기존 체제를 유지하는 데 힘을 보태게 되었다는 말이다. 제법 말이 되는 소리다.

그러나 오래가면 무엇하나. 그 오랜 역사 속에서 나라는 무너질 대로 무너져 내렸고 백성은 그 긴 역사만큼이나 길고 험한 고통을 당했다. 비숍 여사가 말하는 ‘모든 것이 천하고 딱하고 초라한 나라 조선,’ 그러다 결국 남의 나라 식민지가 되어 버렸다.

4. 성공과 실패의 배경: 일본과 조선

지난 5월 일본여행을 했다. 명치유신과 정한론(征韓論)의 현장을 다시 한번 둘러보고 싶어서였다. 배낭을 메고 동경을 거쳐 옛 사쓰마번(薩摩藩) 지역과 죠수번(長州藩) 지역을 돌았다. 지금의 가고시마현(鹿兒島県) 지역과 야마구치현(山口県) 지역이다.

배낭을 메고 걷고 또 걸으며 생각했다. 일본 역시 임진왜란 이후 쇠락하기 시작했던 나라이다. 1853년 미국의 페리제독이 흑선을 타고 지금의 동경인 에도(江戶)만에 나타났을 때만 해도 이 나라 역시 시원치가 않았다. 정부인 막부는 허약하기 짝이 없었고 일반 백성들은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다니는 ‘미개한 사회’였다.

미국과 맺은 1854년의 미일화친조약과 1858년의 미일수호통상조약은 당시의 막부가 어떤 형편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둘 다 겁에 질려 맺은 말도 안 되는 불평등조약이었다. 특히 미일수호통상조약은 일본의 관세자주권을 제약하고 미국인의 일본 내 범죄행위에 대해 치외법권을 인정해 주는 내용까지 들어 있다.

이런 나라가 명치유신을 통해 새로운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십 년 만에 중국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옆 나라 조선을 식민지로 집어삼키는 나라가 되었다. 심지어 그 힘과 자신감이 넘쳐 대동아공영, 즉 아시아를 하나로 만들어 공동번영하게 한다는 일본판 제국주의의 꿈까지 꾸는 나라가 되었다.

무엇이 달랐을까? 어떻게 이 나라는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 네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갔다. 먼저 그 하나, 목숨을 아끼지 않는 개혁주의자 또는 혁명가들의 존재였다.

쇼카손주쿠(松下村塾) 학당을 열어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을 길러 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그는 막부를 타도하기 위한 활동을 하다가 30살에 처형되었다. 20대의 나이에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과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의 배경이 되는 대동아공영론을 주창한 인물이었다.

소위 4대 천왕이라 불렸던 그의 수제자 요시다 토시마로(吉田稔麿)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이리에 쿠이치(入江九一) 모두 20대의 나이에 반 막부 활동을 하다가 피살되거나 자결했다.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만이 28세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병사했다. 그러나 그 역시 1천 명의 군사로 막부군 2만 명을 상대로 싸우는 등 모든 활동과 모든 전투에 목숨을 걸었다.

사쓰마번(薩摩藩)과 조슈번(長州藩)의 동맹, 즉 삿쵸 동맹을 성사시켜 메이지 유신의 정치ㆍ군사적 기반을 마련해 준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역시 30의 나이에 암살을 당했다. 또 명치유신의 영웅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자신이 조선으로 건너가 임금을 모욕하다 처형당해 죽을 테니 이를 이유로 조선정벌에 나서라 고집하기도 했다. 자신의 이러한 정한론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했고, 이후 정부군과 대립하다 패색이 짙어지자 자결을 했다.

이들 대부분은 막부가 미국을 비롯한 열강에 굴복하는 것에 격분해 막부를 타도하는 ‘토막(討幕)’의 깃발을 든 하급무사들었다. ‘하급’은 권력의 외곽이나 변방에 놓여 있었다는 뜻이고, ‘무사’는 강한 의지와 호전성, 그리고 ‘멋있는’ 죽음에 대한 낭만적인 생각이 있었다는 뜻이다. 혁명이나 근본적 개혁이 어디서 누구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둘째, 막부와 분리된 왕의 존재가 있었다. 막부를 치는 것은 혁명이자 쿠데타였다. 유신의 주역들에게는 이를 정당화할 그 무엇이 필요했다. 왕은 이 점에 있어 더 없어 소중한 존재였다. 왕을 모시고 오랑캐를 내 쫒는다는 뜻의 ‘존왕양이(尊王攘夷)’는 막부에 불만을 가진 하급무사들의 가슴을 뛰게 했다.

막부에 대한 불만이 커질수록, 또 열강들의 개방 압력이 거세질수록 왕은 종교가 되고 신이 되었다. 무엇을 위해 죽을 것인가? 요시다 쇼인이 답했다. “왕을 위해 죽어라.”

오랜 세월 무사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다이묘, 즉 봉건영주를 위해 죽었다. 왕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느새 이들의 가슴 속에서 다이묘가 아닌 왕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막부타도를 넘어 봉건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기운이, 또 왕을 중심으로 하는 통일체제로의 꿈이 확산되고 있었다. 다시 요시다 쇼인의 말이다. “일군만민(一君萬民), 천하는 왕이 지배하고, 모든 백성은 그 아래 평등하다.” 다이묘의 자리는 이미 없어지고 있었다.

셋째, 분권적 체제이다. 명치유신의 주역인 사쓰마번(薩摩藩)과 조슈번(長州藩)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집권을 확정해 준 세끼가하라 전투에서 반대편인 서군에 속해 있었다. 당연히 막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군의 선봉을 섰다가 영지를 대폭 삭감 당한 조슈번은 더욱 그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번(藩)은 농업과 무역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군사력을 기를 수 있었다. 봉건적 분권 체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카스기 신사쿠와 사이고 다카모리 등은 때로 다이묘를 도우며, 또 때로는 이들과 싸워가며 각기 자신들이 속한 번(藩)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 힘으로 막부를 쳤다. 왕의 존재가 이들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면, 분권체제 위에서 강화되었던 이 두 번(藩)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이들이 행동할 수 있는 물리적 기반과 지리적 거점이 되었다.

그리고 넷째, 거버넌스 구조의 개혁이다. 명치유신 이전의 막부체제는 군사지도자인 쇼군이 지배했다. 군사적 긴장이 있을 때 그러한 긴장을 근거로 다이묘들을 누르는 체제였다. 평화가 오래 지속되고, 그래서 다이묘들이 원심력을 발휘하게 되면 문제가 생기게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다. 상공업의 발달과 도시화, 그리고 민권신장 등의 사회변화를 소화해 낼 수 있는 체제도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정책과정과 행정구조가 너무나 단순했다. 각 번(藩)이 잘 소화해 주면 다행이었겠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번(藩)이 감당할 수 없는 전국적 규모의 정책수요와 행정수요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막부체제는 그대로 존속될 수 없는 구조였다는 말인데, 명치유신의 주역들은 이 모든 것을 혁명적으로 바꾸었다. 대정봉환(大政奉還)을 통해 막부가 가진 통치권을 왕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판적봉환(版籍奉還)을 다이묘들의 영지와 영민(領民)도 왕에게 돌려주었다. 이어 폐번치현(廃藩置県), 즉 다이묘들의 번(藩)을 중앙행정조직에 편입시켜 부(府)와 현(縣)으로 개편하였다. 봉건적 분권체제를 중앙집권체제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다. 대정봉환 이후 중앙정부의 구성도 완전히 바꾸었다.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분립을 표방을 했다. 그리고 행정기구를 강화하는 동시에 입법을 담당하는 공의소(公議所)를 설치했다. 공의소에는 명치유신을 이끈 하급무사 출신의 인사들이 대거 포진시켰다. 거버넌스 구조, 즉 국가운영체제의 혁신과 함께 정치의 주체를 쇼군과 다이묘에서 이들 신진세력으로 교체하는 세력교체를 이룬 것이다.

조선은 여러 가지 점에서 달랐다. 우선 조선은 혁명적 사고와 전투력을 함께 갖춘 하급 무사가 없었다. 있다고 해도 그 실력을 키울 만한 분권적 체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개혁세력의 인적ㆍ물적 토대가 그만큼 약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게다가 임금이 정부고, 정부가 곧 임금이었다. 정부에 대한 비판은 곧 임금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었다. 선각자들의 비판이나 충언도 그것으로 끝날 뿐, 세력화될 수는 없었다. 특히 국가운영체제 문제는 더욱 그러했다. 자칫 역모로 몰릴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 결과 이미 생명을 다한 왕정과 국가운영체계가 그대로 존속하게 되었다. 왕의 존재가 막부에 대한 비판과 공격을 정당화시켜 주었던 일본과는 완연히 다른 구도였다.

5. 깊어지는 우려: 지금의 우리는?

다시 이율곡 선생의 말씀: “서둘러 개혁을......... ”
우리 힘으로 나라를 되찾지 못했기 때문일까? 우리는 망국의 역사를 잊고 있다. 그러는 사이, 다시 이상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자살률 세계 1위, 빠르게 늘어나는 한계기업, 위축된 기업투자, 세계 최고 수준의 가계부채 비율, 너 죽고 나 죽는 자영업 생태계, 심화되는 양극화, 방위산업 등. 안보와 안전에까지 파고든 비리.......,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날까? 이유는 하나다. 국가의 대응이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가 빠르면 이에 대한 대응도 빨라야 한다. 또 문제의 구조가 복잡하면 대응의 내용 또한 더 치밀해야 한다. 시의적절하고 합리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누구의 말인가? 앞서 소개한 이율곡 선생의 말씀, 바로 그것 아니겠나. “때가 바뀌면 법도 바뀌어야 합니다........ 세월이 흘렀으니 세상도 바뀌고 일도 바뀌었을 겁니다........ 서둘러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가족제도가 약화되면 국가와 사회가 그 기능을 대신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외로운 노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한계기업이 늘어나는 것도 마찬가지. 시장에서 생존하기 힘든 기업은 다른 산업으로 전환해야 한다. 당연히 이를 위한 금융지원이 이루어지고, 노동자를 재배치시키기 위한 재교육 프로그램도 강화되어야 한다.

다른 부분도 그렇다. 과거처럼 국가가 기업의 투자위험을 감당해 줄 수 없는 형편이면 자본시장이 이를 감당하도록 해야 한다. 복지 수요가 늘어나면 조세구조를 바꾸어 재정을 더 확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청년실업을 줄이려면 서비스 산업 등 양질의 일자리를 늘릴 수 있는 산업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어떤가? 이 모두를 잘하고 있나? 아니다. 그렇지 못하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구호는 요란하다. 경제민주화, 규제개혁, 조세개혁, 노동개혁, 교육개혁, 창조경제, 문화융성....... 그러나 막상 일어나는 일은 연금개혁 찔끔 노동개혁 찔끔, 이것 찔끔 저것 찔끔, 이익 선생이 말하는 ‘대장장이 짓’이다. 어느 특정 정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어느 정권 할 것 없이 그렇다.

문제의 근원: 국가운영체계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많은 사람들이 답한다. 세력 교체를 해야 한다고. 지도자 교체를 해야 한다고. 저 당이 아닌 이 당이 집권을 하면 되고, 저 사람이 아닌 이 사람이 하면 된다고. 그래서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고, 어느 쪽이 다수당이 되어야 한다고.

기만이다. 모두 거짓말이다. 세력교체, 지도자 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자동차로 치면 동력장치와 기어장치 그리고 브레이크가 모두 고장 난 상태이다. 누가 운전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게 없다. 세종대왕이 와도, 이순신 장군이 와도 그렇다.

문제는 거버넌스 구조, 즉 국가운영체계에 더 크게 있다. 명치유신 이전의 막부가 그러했듯이, 또 임금이 통치했던 조선의 지배구조가 그러했듯이 지금 우리의 거버넌스 구조는 이미 내려앉은 자동차처럼 그 생명이 다 됐다.

국회만 해도 그렇다. 대화와 타협의 기구이다. 또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와 신념이 부딪치는 기구이다. 무엇을 빠르게 결정할 수 있는 기구가 아니다. 당연히 우리가 원하는 만큼, 또 우리가 원하는 방향대로 작동하게 되어 있지 않다.

흔히들 싸움만 하고 있으니 문제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틀렸다. 국회는 원래 싸움을 하는 곳이다. 해야 할 싸움은 하지 않고 엉뚱한 싸움만 하고 있으니 문제이지 싸움을 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는 없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다툼이 없고 대치가 없는 국회는 없다. 원래 싸우고 대립하는 기구이고, 그래서 빠르고 복잡한 변화에 대해 시의 적절하게, 또 치밀하고 합리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기구이다. 적지 않은 미래학자들이 이를 ‘농경시대의 유물’이라 하는 이유이다.

그러면 다른 나라의 국회는 어떻게 잘하고 있나? 글쎄 잘하고 있나? 오히려 연명하고 있다는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그 연명의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우선 그 하나는 그 기능과 권한을 다른 기구에 넘겨주는 것이다. EU와 같은 지역단위 연합정부에 넘겨주고, 대통령이 이끄는 행정부나 수상이 이끄는 집행부로 넘겨준다. 또 노사정위원회나 환경관련 위원회 등 독립 위원회 등으로 넘겨주기도 하고, 지방의회 등의 지방조직으로 이양하기도 한다.

또 다른 하나는 그 기능과 권한의 일부를 아예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이를테면 해야 할 규제를 하지 않고 시장자율에 맡겨 버리는 것 등이다. 그래서 금융위기도 일어나고 했지만 말이다.

우리 국회는 어떤가? 이런 연명을 위한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권능을 강화하겠다고 설친다. 이를테면 지방분권 체제를 제대로 확립하기 위한 일은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리저리 엉망인 지방자치를 만들어 놓고 공천권 행사 등을 통해 그 위에 올라탈 생각만 하고 있다.

비유하자면 소화시켜낼 능력도 없는 자가 음식을 있는 대로 끌어 앉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다 왜 이 모양이냐 비판하면 “저 친구들 때문에 그렇다”며 아무에게나 손가락질을 한다. 상대 정당을 욕하는 것은 기본이고, 급하면 동료 의원들에게까지 십자가를 씌워 도마뱀 꼬리 자르듯 목을 친다. ‘현역 물갈이’라는 게 바로 그런 것 아니겠나. 심각한 기만행위이다.

대통령이라 하여 무엇이 다르겠나. 행정부 관료의 책상 위에서 출발한 법안이 행정부 내의 절차를 거쳐 국회를 통과하고, 그래서 집행단계에 이르기까지 평균 35개월이 걸린다. 임기 초에 시작하면 레임덕이 시작될 쯤에나 집행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도 살아남은 법안의 경우이다. 중간에 죽어 없어지는 것 또한 수없이 많다. 무엇을 그리 많이, 제대로 할 수 있겠나.

보기에 따라 대통령의 힘은 막강하다. 특정기업을 죽일 수도 있고 누구 한 사람에게 특혜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 힘은 힘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사회가 당면한 구조적인 문제들을 풀 수 있느냐의 문제인데, 그런 힘은 없다. 때로는 대통령이 하자고 하면 더 안 된다. 야당이나 여당 내의 반대세력 등이 이를 대통령을 압박하는 카드로 쓰기 때문이다.

관료행정 체제는 더 말할 것 없다. 온갖 규정과 지침들이 관료들에게는 밟으면 터지는 지뢰가 되고 있다. 지뢰밭에서는 움직이지 않는 게 상책이다. 일하고 싶어도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러한 규정과 지침을 없애면 되지 않느냐? 그렇지가 않다. 나름 다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 그래서 함부로 없앨 수도 없다.

최소한 시험 하나는 쳐서 들어가는 게 관료행정 조직이다. 그래서 괜찮은 인재들이 모인다. 그러나 이렇게 들어 온 인재들을 곧 이런저런 눈치나 보는 눈치꾼이 된다. 그래서 관료행정 조직을 ‘인재의 무덤’이라 부른다. 이 거대한 조직이 이렇게 ‘무덤’이 되어 있는 판에 과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런 국회와 대통령, 그리고 관료행정 조직을 이대로 두고 나라가 잘되기를 바란다? 아서라. 이미 내려앉은 자동차이다. 누가 운전해도 소용이 없다. 미동이야 할 수도 있다. 1~2㎞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빠르게 변하는 세상은 따라갈 수는 없다.

대통령의 죽음, 그 의미
사실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이 권위주의적 거버넌스 구조로는 더 이상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면,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쓰라린 경험은 지금과 같은 거버넌스 구조도 더 이상 안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그렇다. 좌에서 얻어맞고 우에서 얻어맞고, 심지어 열렬한 지지자들까지 등을 돌린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다.

얼마나 많은 대통령이 만신창이가 되어 임기를 마쳐야 그것이 대통령 개인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까? 얼마나 많은 정치지도자와 국회의원들이 ‘나쁜 놈’ ‘무능한 놈’ ‘더러운 놈’이 되어야 그것이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까? 또 얼마나 많은 관료들이 눈치나 보는 ‘공적’이 되어야 그것이 사람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까?

노무현 대통령이 생각난다. 왜 학자도 언론도 이 잘못된 국가운영 체계에 대해 말을 하지 않느냐 물어오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한두 번이 아녔다. 수십 번 수백 번 물어왔다. 오죽하면 그런 고민의 일단을 이야기하는 학자의 글을 읽었다며 좋아하고, 그래서 그 학자를 불러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발표까지 하게 했겠나.

그 대통령은 가고.......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도 많고, 이 글을 쓰는 사람을 포함하여 그를 파는 사람도 많다. 그의 이름으로 정치현장을 누비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허공을 맴돌고 있다.

그러는 사이, 풀어야 할 문제를 풀지 못하는 정치는 여전히 더러운 것, 그래서 잃을 것 없는 자들이나 하는 것이 되어 있다. 양식 있는 자들은 스스로 거리를 두고, 이에 뛰어드는 자들은 자의건 타의건 오로지 권력 그 자체를 위해 권력을 쫓는 모양이 되고 있다. 조선을 망국으로 이끈 세도정치의 무리들, 그들과 같은 모양이다. 지금 가는 길이 망국의 길이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6.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나라의 ‘하급무사들’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던 만큼, 그래서 문제가 쌓이고 쌓인 만큼 근본적인 개혁을 해야 한다. 시진핑 주석이 말하는 ‘봉황열반((鳳凰涅槃) 등롱환조(騰籠換鳥),’ 즉 봉황새가 스스로를 불에 태워 그 재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듯, 또 새장을 들어 올려 새를 완전히 바꾸듯 개혁해야 한다. 이익 선생의 말을 빌린다면 ‘용광로에 부어 새로 만드는’ 정도의 개혁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운영의 틀을 바꾸어야 한다. 즉 국민의 신념과 이해관계를 잘 모을 수 있는, 그래서 의제가 되어야 할 것이 의제가 되는, 그러면서도 빠르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그러한 거버넌스 구조가 확립되어야 한다.

그것이 어떤 것이냐에 대한 논의는 이 글의 범위를 넘는다. 또 혼자 마구 이야기할 일도 아니다. 다만, 세 가지의 기본 원칙만 이야기해 두자.

첫째 그것은 지방분권지향적이고 참여지향적인 것이어야 한다. 대의정치의 모순이 분명해지는 만큼 권력을 원래의 주인인 국민들에게 가져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국민들의 에너지가 국가운영의 동력이 되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경쟁하는 체제를 통해 사회변화에 대한 국가 전체의 대응능력을 키워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숙의(熟議)가 작동하는 체제이어야 한다. 참여지향적인 것이라 하여 일반 국민을 마구 참여시키는 것은 반민주적 행위이다. 모바일 투표가 불러올 수 있는 문제를 생각해 보면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참여, 파편적인 의견이 주도하는 참여는 오히려 민주주의의 적이 될 수 있다. 참여는 반드시 서로가 지식과 정보를 교환할 수 있고, 또 의견을 나누며 생각할 수 있는 숙의가 수반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셋째, 이러한 거버넌스 구조의 개혁은 새로운 세력 내지는 집단이 주도해야 한다. 그 운영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기존의 정치세력은 여야를 막론하고 이미 기득권 구조에 함몰되어 있다. 새로운 거버넌스 구조를 만들 수도 없고 운영할 수도 없다. 기존 정치권 내의 세력교체가 아니라 기존 정치권 전체를 경계하는 세력교체여야 한다는 말이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좀 더 손에 잡힐 만큼 설명을 할 수는 없나? 좋다. 이왕 이야기를 꺼내 놓았으니 머릿속에 든 그림의 한 조각이라도 드러내어 보자. 물론 같이 생각하고 같이 다듬어 가야 할 내용이다.

우선, 새로운 거버넌스 구조를 만들고, 또 이를 운영하는 주체의 문제이다. 기존의 정치세력이나 집단이 아닌 새로운 집단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권력의 핵심에 있지 않은 사람들, 그러면서 잘못된 정치와 행정으로 인해 피해를 입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취업 걱정을 하는 젊은이들, 취약한 사회안전망에 영세 자영업으로 몰려 고생을 하고 있는 사람들, 구조조정을 걱정하는 사람들, 노후가 걱정되는 사람들이다.

결례가 되는 표현이지만 굳이 말하자면 ‘하급무사들’이다. 근본적 개혁은 언제나 이 ‘하급무사들’의 몫이다. 명치유신도 그렇고 프랑스 혁명도 그렇다. 이들 ‘하급무사들’이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한 발자국씩만 앞으로 나와 주면 세상은 달라진다. 즉 스스로의 문제를 혼자 고민하는 것을 넘어 같이 나라 걱정을 한 번 해주고, 무엇이 잘못되었는가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해 주면 많은 것이 변한다.

그러면 이들을 어떻게 불러낼 것인가? 핵심은 지방이다. 지방정부 주변에 이들이 자유롭게 참여하고 토론할 수 있는 시민의회를 만드는 것은 어떨까? 실제 있었던 예를 하나 들자. 아이들을 키우는 어머니들이 200여 명 모였다. 그리고 지방정부가 가진 보육예산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토론했다. 몇 시간 토론 뒤 투표를 통해 우선순위를 정했고, 이를 지방정부 수장과 지방의회에 전했다. 이를 전달받은 지방정부 수장이나 지방의원들이 어떻게 반응했겠나? 크게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동네 안에 국가가 있다’
거버넌스 구조를 바꾼다는 것이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이런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지금의 지방정부와 지방의회는 잘못되어 있다. 공천과정부터 엉망이니 더 말할 것이 없다. 당연히 거버넌스 구조의 문제도 심각하다. 그러나 모두들 한 발자국씩만 앞으로 나오고, 그래서 이러한 시민의회나 민회 활동이 조금만 활성화되어도 많은 것이 달라진다.

처음에는 생활과 직접 관련된 사안을 중심으로 시작할 수 있다. 보육, 보건, 교통, 지역치안 등 많은 사안들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차차 이를 일반 행정문제로, 또 국가와 지방정부 간의 권한배분 문제로 확대해 나갈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활동이 성숙되면 전국적인 차원에서의 시민의회나 민회가 이루어질 수도 있다. 또 이런 과정을 통해서 길러진 지도자들이 지방정부 운영의 주축이 될 수도 있다.

한 지방정부가 바뀌면 그 옆의 지방정부가 바뀐다. 소위 내부경쟁의 원리이다. 중앙정부는 경쟁자가 없지만, 지방정부는 주민의 눈치를 보며 옆의 지방정부와 경쟁을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지방정부들이 바뀌게 되면 중앙정부도 바뀐다. 중앙정부 또한 지방정부와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중앙차원에서의 세력교체를 말한다. 정권교체를 하자는 집단도, 제3당을 추진하는 집단도 그렇다. 세력교체가 이 나라를 바로 세우는 길이라 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라. 기존 정치권 내의 세력은 그 세력이 그 세력이다. 결국은 안동김씨냐 풍양조씨냐의 문제다. 문제를 풀 수 있는 해답은 어차피 그들에게 없다. 정당정치와 의회정치의 틀을 넘는 거버넌스 개혁은 더욱 그렇다. 이미 그 안에 속해 있는 그들에게 어찌 이를 뛰어넘는 대안이 있겠는가.

‘하급무사들’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개혁, 또 이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거버넌스 구도의 구축, 돌아가는 길이지만 오히려 더 빠른 길일 수 있다. 동네가 바뀌면 나라가 바뀌기 때문이다.

“동네 안에 국가가 있다.” 1991년 담배자판기금지조례를 만들어 학교 앞에서 담배자판기를 철거하게 했던, 그래서 그것이 퍼져 전국 모든 지역의 학교 앞 담배자판기를 철거하게 만들었던 부천 YMCA 보고서의 부제이다. “우리 동네의 작은 법 하나가 지금 전국으로 메아리쳐 가고 있습니다.” 그 보고서의 마지막 부분의 글이다.

7. ‘왕’을 위해

다시 신미양요에서의 광성보 전투를 생각한다. 성벽 난간에 올라가 총을 가진 적군을 향해 돌을 던지는 병사, 그러다 적군의 총에 머리를 맞고 쓰러지는 병사. 그 참담하고 슬픈 장면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노인들의 모습과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젊은이들의 모습, 그리고 가계부채에 시달리는 영세 상인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확실히 우리는 망국 조선이 걸었던 길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는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다시 식민지가 될 일도 없고, 주권을 빼앗길 일은 없다고? 지금 세상에 식민지가 어디에 있느냐고? 식민지가 되고 주권을 빼앗겨야 망국인가? 많은 국민이 참지 못할 만큼 힘들어하면 그것이 망국이다. 그래서 식민지가 되기 오래전을 조선을 이미 나라가 아니었다고 하는 것이다.

때로 절망한다. ‘이기자’만 외치는 여의도 정가의 모습에, 움직이지 않는 관료행정 체제에, 또 쌓이고 쌓이는 문제에 절망한다.

그래도 어쩌겠나. 이 나라가 내 나라이고 우리나라인데. 같이 고민을 하자. 권력의 변방에 있을수록, ‘하급무사’일수록 더 큰 고민을 하자. 국민이 ‘왕’인 세상, 그 ‘왕’을 위해 기치를 들고, 그 ‘왕’을 위해 새로운 길을 찾자. 그래서 내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만들자.

김병준의 특별기고
사회디자인연구소
http://www.socialdesign.kr/news/articleView.html?idxno=7022

 

사회디자인연구소  webmaster@pressbyple.com

<저작권자 © 프레스바이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사회디자인연구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