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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은 미국이 잉태시켰다1994년에 북미 수교가 이루어졌더라면?

인과응보,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다. 페이스북에 북한 핵과 생화학 무기, 장거리 미사일 등이 생겨난 데에는 미국의 책임이 크다는 말을 썼더니 무지(無知)의 소산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과연 그런가?

1991년 소련이 사라졌다. 그 전조는 이미 80년 말부터 이어져 왔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미소 양국이 주도하던 냉전 시대의 종말은 북한에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경제 문제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소련의 핵우산 보호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편, 주한미군은 195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 전술핵 배치를 완료해 놓았다. 이는 북한보다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실제적 위협은 북한이 앞장서서 받은 꼴이었기 때문에 한반도 비핵화 요구는 북한의 오랜 주장이었다.

북한 정권이 핵을 가지려는 욕심은 오래되었고 1985년 즈음에 본격화했다는 게 정설이지만, 이런 욕심을 효과적으로 견제한 것은 소련과 중국의 핵우산 보장과 원조 등이 큰 이유였는데 하루아침에 이게 사라졌다. 비슷한 시기에 독일은 평화적 통일까지 이루는 마당에 한국에는 미국의 핵무기가 대량으로 배치된 상태에서 대치하고 있었으니 이는 북한에 중대한 위협으로 작용했을 게 분명하다.

알려진바, 북한은 78년에 북한 전역에서 우라늄 탐사를 했고 80년에 영변 5MW 원자로, 85년에 50MW 원자로의 건설을 착수했다. 플루토늄 추출은 80년대 후반 또는 90년대 초부터 이루어졌으리라고 추정된다. 한편, 북한은 1985년에 소련의 요구로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했고, 뒤늦은 1992년에 핵안전협정에도 서명했다.

비슷한 시기에 중동에서는 걸프 전쟁이 벌어졌다. 미국이 주도하는 34개국 다국적 연합군에 이라크군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후 2003년에 제2차 걸프 전쟁이 벌어져 사담 후세인의 권력도 결국 끝이 났는데 전쟁 발발의 원인이었던 ‘대량살상무기’는 나오지 않았다. 이후 내전에 시달린 이라크는 지금까지도 치안 상태가 매우 불안정해 우리나라 국민은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여행할 수 없는 곳이다. 북한에는 반면교사의 역할을 톡톡히 했을 것 같다.

1991년 9월, 미국은 한국에서 핵무기를 철수시켰고 북한이 핵 사찰을 수용할 시 팀 스피릿 훈련을 중단하기로 약속했으며, 노태우 대통령도 한반도에 핵무기가 없다고 선언했다. 북은 제안을 수용하여 12월 31일 남한 측과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서명 후 1992년 핵안전협정에 서명하고 IAEA 사찰을 수용했다.

사찰은 92년 5월 25일부터 93년 2월 6일까지 6차례에 걸쳐 시행되었다. 그러나 92년 7월 2차 사찰에서 북이 제출한 보고서에 적힌 플루토늄의 양과 실제의 양이 불일치했고, 16개 핵시설 외에 핵시설 의심지역 2개가 발견되어 양자는 다시 충돌하게 되었다. 당시 IAEA는 미국 CIA로부터 첩보 위성이 촬영한 사진을 넘겨받아 영변의 2개 시설이 핵폐기물 저장장소로 의심된다면서 사찰을 요구했다. 국제기구인 IAEA가 미국 CIA로부터 자료를 받았다고 하면 이상한 모양새가 되는 건 당연하다.

이에 북한은 IAEA가 미국의 사주를 받은 단체라 하여 강력히 맹비난하면서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북측은 핵 문제가 불거진 게 미국 펜타곤과 CIA 등 강경파들이 위성 첩보 사진 등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IAEA를 부추겨 '북한 죽이기'를 취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미국도 가만히 있지 않고 IAEA의 핵사찰을 강제하기 위해 1992년에 중단된 팀 스피릿 한미합동훈련을 1993년부터 재개토록 하는 등으로 군사적 압박을 가했다.

영변 핵단지 [출처: 구글 어스]

1993년은 북미 모두에게 정권 교체의 시기였다. 클린턴과 김정일은 집권 초기에 나약한 이미지로 각인되지 않기 위하여 강경정책을 고수했다. 북방정책을 펴던 노태우와 달리 김영삼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미신고시설 사찰 거부를 고집하던 북에 대응해 한미는 93년 초 팀 스피릿 훈련 재개를 선언했다. 북한은 미신고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에 반발했고, 미국은 미국대로 숨겨진 시설이 있다면서 압박한 결과 북한은 준전시 상태를 선포했고 NPT를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역사의 변곡점은 아마도 이때쯤이었을 듯하다. 1994년 10월 21일 북미는 ‘제네바 합의’에 이르게 된다. 내용은 4개 항으로 1. 북한의 흑연감속 원자로 및 관련 시설을 경수로 원자로 발전소로 대체, 2. 정치적, 경제적 관계의 완전 정상화, 3. 핵이 없는 한반도 4. 국제적 핵비확산 체제 강화였다. 이때 만약 북미 수교가 이루어졌거나 개방과 더불어 북한의 경제적 발전이 이루어졌더라면, 지금 한반도의 상황은 전혀 달라졌을 게 분명하다.

2000년에는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과 김정일이 회담했고,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경수로 공사는 8년이 지난 2002년 8월 7일에 겨우 첫 삽을 떴는데 이 시기는 이미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에 포함하면서 북미 관계가 냉각된 때였다. 경수로 공사는 결국 중단되고 만다.

돌아보면 북한 핵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는 시기는 냉전의 해소와 함께 세계가 급속한 변화를 이루고 있을 때였지만 유독 한반도는 냉전 시기와 별로 다르지 않은 길을 걷는다. 2차대전과 한반도의 분단, 동서 냉전의 시기에 남북한은 모두 독재정권 치하에 있었다. 70년대쯤 남북의 경제력이 뒤바뀌는데 이는 미소의 경제력 차이와 궤를 같이한다. 이른바 공산주의의 몰락은 북한을 비껴가지 않았다.

경제력에서 뒤처지고 첨단 무기 경쟁에서 뒤떨어지는 국가가 위협을 받을 때, 이른바 비대칭 전력이라는 핵무기에 대한 욕심을 가지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위협이 아니라 안전을 보장하는 게 이런 욕심을 잠재우는 방법이다. 그런데 미국은 이런 방향을 선택하지 않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를 들이댈 수 있겠지만 미국과 북한은 대등한 나라가 아니다.

그 결과,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고 했던가? 클린턴 정부 동안에 제네바 합의가 이루어졌는데도 부시 정권이 들어서자 뒤바뀌는 등 진통을 겪다가 마침내 2006년 북한은 제1차 핵실험을 감행한다. 경제적 풍요가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고 개방과 교류가 폐쇄된 권력을 녹이는 근원적 힘이라는 점에서 보면 압박 일변도로 북한을 다룬 대가는 그야말로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도 못 막을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글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민주적 절차에 따라 권력이 교체되는 국가는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다. 이는 전쟁을 수행하는 데에서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 최고의 군사력과 핵무기 보유량이 있을지 몰라도 핵폭탄 몇 개만 미국 본토에 떨어지면 미국 대통령이 전쟁을 고수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문제는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면 미국의 세계 패권에 구멍이 난다는 점에 있다. 지구에는 미국만 있는 게 아니라 러시아도 중국도 버젓이 있기 때문이다.

등위(等位) 밖의 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사이 2등, 3등이 가만있을 리 없다. 미국과 북한이 결국 합의에 이르게 되리라는 걸 예상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보이지도 않는 작은 나라와 괜한 다툼을 벌이다가 덩치 큰 상대들에게 제대로 당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에 어떤 방식이든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린 게 지금 미국이 처한 현실이다.

결국, 북한 핵 문제는 미국의 대북한 정책 실패가 가져온 산물이며 이를 평화롭게 해결해야 하는 책임은 냉전이 해소되는 시기에 한반도의 대립을 방치 또는 조장한 대가를 치르는 길이기도 하다. 초강대국으로서의 체면치레라도 하면 그나마 다행인.

 

박정원 편집위원  pjw@pressbyp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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